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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요재공>석천공휘휴경실기(石川公諱休景實記)
石川公諱休景實記 府君諱休景初諱泳鎬字元重號石川吾趙系出玉川忠獻公長子樂齋公諱瑛后玄洲公諱彭孫爲寶城分派之祖而累傳至明齋公諱泰新壽階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高祖曾祖諱東一號龍村通訓大夫司憲府監祭祖諱炫桂號警庵考諱澈垣號靜齋受貫以來籍祖相繼以忠孝傳家外祖光州李鎭良府君以高宗辛未六月一日生于靑龍世庄自幼穎悟沈潜初受學於家塾隨讀諳記應對進退一如所授有如成人靜齋公喜曰兒前程歩驟將有所期耶十五乙酉挈家移于烏城之龜山三年後戊子靜齋公歿哭泣悲哀喪葬諸禮一如老宿同里任文七李化翊諸公歎曰生子必如趙某云又移于栗於面光川當甲午亂同穉弟與妹奉母夫人設智謀而得全危難亦一奇蹟河清後丙申復移居于蘆洞面鳳和村自是耕讀爲課兄弟湛樂師事于月波貞先生戊午弟氏諱柱鎬忍窩公歿深恨其無嗣而早逝對人輒流涕嗚咽使聞者酸鼻翌年己未荐遭内艱尤自慟單子謹遵成禮而泣血終喪同里朴仁彥先生嘖嘖稱曰蕩板今日趙某可謂頹波砥柱也及鳴鳳驛之設也車輛激突於前後烦鬧可厭遂決意復移于彌力面石虎山下程子川上構一小軒爲終老計日與朴春軒朴竹溪文一陽諸公互相講磨爲至樂盖自靑龍至于斯播遷移搬凡四矣府君之一生可謂奔走不暇者也然皆爲擇隣非徒爲生理然也後勒削之騷日警西田者敢試一劇府君峻責曰吾聞貴邦亦學孔子云今我保我髮何敢無禮西田色沮無辭逡巡而退甲戌七月初偶感微疾刀圭罔效一日招余以諭曰吾素爲心者欲無大過而了平生擇仁里而居使汝輩爲麻蓬之計矣素志未遂而逝可恨也己勉之勉之幸勿墜先緖吾可瞑目於泉下矣言訖而終即九月二十二日也享年六十四襄奉于活川先塋左局負乾原配靈光金氏考諱漢馥己卯生壺範淑儀頗多内助庚子正月二十七日卒別葬于石虎山馬虎洞嶝壬坐原育一男一女男即不肖女適珍原朴佑福孫權翼仝基出系從祖柱鎬公后坪翼奉翼外孫朴圭在玉在嗚呼偃仰之間不肖亦兩鬢己斑斑一無所就罪思孺慕難容自釋謹撮先人事行之一端以徵來裔之的考焉 不肖男 台勲 泣血謹記 석천공휘휴경실기(石川公諱休景實記) 부군의 휘는 휴경(休景)이요 초휘는 영호(泳鎬)요 자는 원중(元重)이요 호는 석천(石川)이니 오조는 계출옥천하니 충헌공 장자 요재공 휘 영(瑛) 후 현주공 휘 팽손(彭孫)은 보성분파의 중조가 되시다. 누대 만에 명재(明齋) 공 휘 태신(泰新) 수계로 증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신데 고조요 증조의 휘는 동일(東一) 호는 용촌(龍村) 통훈대부사헌부감찰이시고 조의 휘 현계(炫桂) 호 경암(警庵)이시고 고의 휘 철원(澈垣) 호 정재(靜齋)이시다. 관향을 받은 후로 벼슬아치가 대로 이어 충효로써 전가하였으니 외조는 광주 이진량이시다. 부군이 고종 신미 六月一日 청룡 세장에서 나시다. 어려서부터 영오 침잠하야 처음 가숙에서 수학할 새 읽으면 문득 암기하고 응대와 진퇴를 가르친 대로 하여 어른 같으니 정재공이 기꺼이 하시며 왈 이 애는 앞길이 빨리 나가 장차 기약할 바 있겠다. 十五세 때 을유에 가권을 이끌고 조성면 귀산으로 이사 가셨다. 三년 후 무자에 정재공이 몰하시니 곡읍과 비애로 상장제례를 노숙한 어른같이 하시니 동리 임문칠(任文七) 이화익(李化翊) 제공이 탄 왈 자식을 나으면 반드시 조모같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율어면 광천으로 이사하시어 갑오난을 당하여 어린 동생과 녀매를 데리고 모부인을 받들며 지혜로 묘계를 써서 그 위란을 면했으니 또한 기적이다. 평란 후 병신년에 또 다시 노동면 봉화촌으로 이사하시어 일로부터 경독으로 직업 삼고 형제 담락하고 월파 정선생(月波貞先生)에게 사사하였다. 무오년에 제씨 휘 주호(柱鎬) 호 인와(忍窩) 공이 몰하시니 그 아들 없이 조사하심을 깊이 한탄하고 남을 대할 때 문득 눈물 흘리시고 목 메이게 서러워하시니 듣는 자로 하여금 몹시도 비통하였다. 다음해 기미에 모부인상을 당하심에 더욱 고단함을 자통하시고 삼가히 예절을 따라 양봉하시고 읍혈로 종상하시니 동리 박인언 선생이 책책히 칭찬하여 왈 법 없어진 금일에 조모는 가히 퇴파의 지주 라 하시다. 명봉역이 설치되니 차량이 앞뒤로 격돌한지라 번요하여 싫다 하고 듸듸여결의하고 다시 미력면 석호산 아래 정자천우에로 이사하시어 적은 집을 마련하시고 종로계를 하고 날로 박춘헌 박죽계 문일양(朴春軒 朴竹溪 文一陽) 저공으로 더불어 서로 경전을 강마하여 지락을 삼으시니 대개 청룡에서 이곳까지 네 번 이사하시다. 부군의 일생은 분주불가하였도다. 그러나 다 이웃을 가리는 것이요 한갓 생리만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강제삭발의 소요가 났을 때 일경 서전(西田)이란 자가 와서 감히 一극을 시험한즉 부군이 준책하여 왈 자기 나라에서도 역시 공자의 학문을 배운다 하였는데 지금 내가 내의 모발을 보존하는데 어찌 감히 이렇듯 무레하느냐 서전이 무색하여 말없이 순순히 물러갔다. 갑술 七월에 우연히 병을 얻으시니 약을 써도 효험이 없고 하루는 나를 불러 이르시되 내 평소에 마음먹기를 대과 없이 일생을 마칠 것이요 인리를 가려 살면서 너희들로 하여금 삼밭 쑥대 같은 계책을 하고저 함이어늘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이 또한 한스럽다. 힘쓰고 또 힘써 선대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마라 내 가히 구천지하에 눈을 감겠노라 하시고 말을 마치고 운명하시니 곧 九月二十二日이니 향년은 六十四라 살내선산좌국부건원에 양봉하셨고 배위는 영광 김 씨니 고의 휘는 한복(漢馥)이고 기묘 七月二十六日生이시니 곤범과 숙의는 자못 내조가 많으셨다. 경자 정월 二十七日 졸하시니 석호산 마호동등 임좌원에 별장하였다. 일남일녀를 두었으니 남은 곧 불초요 녀는 진원 박우복(朴佑福)에게 출가하고 손은 권익 동기는 종조주호공후로 출계하였고 평익 봉익이요 외손은 박규재 박덕재 박옥재이다. 오홉다 엄벙덤벙하는 동안에 불초가 이미 양빈이 반반하여 소소하니 한 가지도 성취 못하고 유모의 정을 죄 지어 생각하면 용납키 어렵고 스스로 보석하여 삼가히 선인사행의 일단을 모아 써 후손의 적실한 참고됨을 증한다. 불초남 태훈 읍혈근기(不肖男 台勲 泣血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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